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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병률 시인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라 아예 모든 시집을 다 사두고 시를 읽고 싶은 시점마다 꺼내보는 듯 하다.
울림이 있었던 시는 앞으로 이렇게 기록해 두고자 한다.
본문은 아래와 같다.
이병률 - 미신
필명을 갖고 싶던 시절에
두 글자의 이름 도장도 갖고 싶어 도장 가게에 가서
성과 이름을 합쳐도 두 글자밖에 안 되는 도장을 파려고 하는데
돈을 적게 받을 수 있느냐 물었다
하지만 남들보다 더 많은 여백을 파내야 하는 수고가 있으니
오히려 더 받아야겠다는 도장 파는 이의 대답을 들었다
다 늦은 그날 밤
술 마시고 집으로 가는 길
한 잔만 더 마시면 죽을 수도 있고
그 한 잔으로
어쩌면 잘 살 수도 있겠다 싶어 들어간 어느 포장마차에서
딱 한 잔만 달라고 하였다
한 잔을 비우고 난 뒤 한 병 값을 치르겠다고 하자
주인이 술값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
당신이 취하기 위해 필요한 건 한 잔이 아니었냐며
주인은 헐거워진 마개로 술병을 닫았다.
바지 주머니엔 도장이 불룩하고
천막 안 전구 주변에선 날파리들이 빗소리를 냈다
도장을 갖고도 거대하고도 육중한 한 시절의 어디에다
도장을 찍어야 할지 모르는 나는
온통 여백뿐인 청춘이었다
여백이 무겁더라도 휘청거리지 말고
그 여백이라도 붙들고 믿고 수고할 것을
그 여백에라도 도장을 찍어놓을 것을
아마추어라 시인의 의도같은 건 잘 모르겠고, 시는 어디까지나 화자가 느끼는 감정이 중요하기 때문에… 내게 와닿은 의미대로 해석해보자면 전체적인 주제는 지금의 청춘이 수고로워도 끝까지 가보라는 응원의 글처럼 느껴졌다.
지름길인 줄 알고 택한 길은 가시밭길일 수도 있고, 내가 찍어나가야 할 여백이 내가 가진 도장으로는 택도 없이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,
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뜻한 위로로 품어주는 시에서의 술집 주인 같은 사람도 있고 세렌디피티스러운 행운이 말 그대로 생각치 못한 순간에 일어나기 때문에 끊임없이 한 걸음 더, 도장을 찍어보자. 이런 의미로 와닿아서 따뜻한 시로 느껴졌다.
이병률의 이렇게 간접적이고 세련된 표현 방식이 여러 번 읽게 만들기도 하고 읽을 때마다 전달되는 의미도 다르게 느껴지는 게 재밌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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